책/책이 나를 읽어 BookLog

어디서,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나우웬과 함께 하는 아침

Minking 2011. 4. 8. 07:17


나우웬과 함께하는 아침
국내도서>종교/역학
저자 : 헨리 J. M. 나웬(Henri J. M. Nouwen) / IVP 편집부역
출판 :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1.01.19
상세보기




1. 책과의 첫만남

헨리 나우웬을 알게 된 것은 첫발령 받은 그 해 우리반 아이의 어머님께서 최근 그의 책을 번역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였다. 그 뒤 남자친구와 헤어져 제법 실의에 빠져 있던 나에게 친구가 마침 자기 가방에 있던 나우웬의 짧은 묵상집인 '나우웬과 함께 하는 아침'을 권해주었고 나는 친구의 낡은 책을 받아 들고 한참 그 마음에 고마워하며 아껴가며 한 줄 한 줄 읽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위로받기 위한 수준에서 읽었지만 어느 순간 한 줄, 한 줄 그의 마음이 되어 읽어나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가톨릭 사제이면서 토론토의 라르쉬 Daybreak 공동체에서 정신지체장애인들을 섬기다 생을 마감했고 또한 저술가로서 수많은 영성에 대한 책들을 남겼다.
안타깝지만 한국에서 가져 온 건 '나우웬과 함께 하는 아침' 이거 한 권이다.


2. 내가 책을 읽고, 책이 나를 읽고

28번째 묵상. '어디서',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오늘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떻게 내 마음의 눈을 주님께 고정시키느냐 하는 문제와 비교해 볼 때, 실로 하찮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예일대학에서 교편을 잡을 수도 있고, 제네시 수도원의 빵 공장에서 일할 수도 있고, 페루의 가난한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도 있지만, 이런 모든 상황에서도 아주 쓸모없ㄷ고 느끼고, 비참하고 우울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장소나 올바른 직업 같은 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에서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그랬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습니다. 가난할 때는 물론 풍요로울 때도, 명성을 얻을 때나 아무도 몰라 줄 때도,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도, 마음이 산란할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결코 상황 자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마음의 상태에 근거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하고 있음을 알 때에는 항상 행복하고 평안합니다. 그러나 불평과 정서적인 욕구들에 휘말려 있을 때는 항상 불안하고 마음이 나누입니다.
이것이 미래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내게 떠오르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5년, 10년, 혹은 20년 동안 리카 같은 곳에 가겠다는 것이 훌륭한 결정인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무조건적으로, 두려움 없이 주께로 향하겠다는 것이 훌륭한 결정입니다.

나는 여길 읽다가 잠시 머물렀다. 결국 그도, 그리고 나도, 결론적으로는 주와 동행할 때 가장 행복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그러한 완전한 행복이 그리워서 주께로 향하겠다는 것이 된다. 대단히 거룩해보이는 그 어떤 사도든 그 어떤 신도든, 어쨌거나 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주를 그리워하는 것, 이것을 잠시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인간은 얼마나 자기사랑으로 뭉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멋지게 돌려 말하고 돌려 결단해도 결국엔 내가 당신과 있을 때 행복하니까 당신을 더 사랑하고 싶은 것이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만이라도, 끝까지 붙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내가 당신의 것이 되면 좋겠다. 사실 내 삶의 마지막을 가끔 상상했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그 길의 마지막에 와서 당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내 행복을 얻기 위해 당신을 이용하는 것과 내 행복이 곧 당신인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내 행복이 주님이라면 딴은 내 단기적인 행복과 당신을 따르는 삶이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는 행복으로 향하는 길이겠으나 종종 그 길은 괴롭고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온전히', '무조건적으로', '두려움 없이' 주께로 향하겠다고 마음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역시 자기사랑으로 뭉친 내가 보여드릴, 한계가 명백한 예배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드리고 싶은 최고의 예배이기도 하다.

(2011. 4. 8. 아침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