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를 되찾아 오는 길
1. 생각에 빠지는 일
잊어버려야 할 것을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잘 간직하는 것.
잃어버려도 좋을 것은 애써 먼저 버려 버리고, 잃어버리면 안될 것은 소중히 잘 간직하는 것.
우리가 이 분류만 잘 되어도, 삶이 얼마나 간결하고 또한 풍성해질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독을 잃어버린 최근의 시간동안 내가 얻은 것들 또한 많았으리라 애써 기대하지만, 사라진 고독의 양 만큼 사유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책을 읽다보니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는 신기한 느낌들이 있었다. 내 안에 사라진 문장들, 사라진 추억들이 하나씩 생각났고 그 시간이 엮이고 엮이며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역자인 공경희 씨의 예언대로, 책의 한 문장씩을 곱씹으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교사가 되고 단 한 번도 내가 꼰대스러워지리라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13년 차에 접어 든 올해 어느 순간부터 내가 참으로 가르치려 드는 자가 되었다는 자괴감에 빠진 날이 있었다. 교훈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히려 배운 교훈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만 적용하려 드는 아집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 것 같다. 그렇게 여전히 내 안에 살고 있는 어린 나를 만난다. 싱싱해서 어린 것이 아니라 어리석어 어린 나. 잠시나마 어딘가에 다다랐다고 느낀 순간이 실은 끝자락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이 길이 참 아득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 가는지는 알 수 있'으려면 뭔가 필요한 것, 나침반과 기준이 되어 줄 삶의 모습, 그게 멘토이든 성경의 한 구절이든 누군가의 모습을 통해 지향점을 발견한다는 것이 그래도 희망이다. 미로를 헤매다가도 언젠가는 나가는 문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민과 사유가 끊어진 삶은 시간과 시류에 끌려만 다니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문득 잡은 책이 이렇게 내 안에 남을 줄 생각하지 못했다.
'우연은 신의 축복'이라고 했던 책 속 한 구절이 이 마음을 반긴다. 종종 우리는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나침반조차 잃어버리는 때가 많다.
2. 눈길이 더 머문 곳
여러 구절 위에 눈길이 머물렀다. 한참 있다가 되돌아 가기도 했고, 그 자리에만 멈춰 있기도 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 여백이 많았다. 그리고 그 여백에서 우리를 헤매게 한다기보다 침묵하게 만들었다. 작가가 의도한 세 주인공의 관계가 전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투명했다.
의미 있게 읽은 여러 문장들을 그대로 옮긴다.
- 새로운 것을 알기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알 필요가 있을 때도 있지요 p.66
- 훌륭한 부모는 훌륭함이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피어나고 있단 걸 아는 사람이지. p.51
- 어둠은 우리의 두려움을 비추지. 어둠이 어떻게 빛이 될 수 있죠? 우리 두려움을 드려내 주니까. 우리 모두 두려움을 갖고 있다가 잠자리로 갖고 온단다. 우리의 두려움도 휴식이 필요하지. p.53
- 감정을 쉬게 하셔야 할 것 같네요. 우정도 음악처럼 침묵이 필요하니까요. p.66
- 지혜의 책들은 우리에게 정의는 자비심을 지키기 위해서만 추구하라고 일깨워주니까요. 내 마음이 그런 식으로 이끌 힘이 없다면? 그러면 비심이 더 위대한 정의인 이유를 아셔야지요. p.67
- 우리는 무엇을 믿을지 결정한 뒤, 믿는 것을 지지할 신념체계를 만들지요. 그게 논리적이니까요. p.86
- 자신감과 의심은 둘 다 전염이 잘 된단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원하던 것을 갖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필요치 않다는 걸 알게 되어 더 부자가 되는 거란다. p.98
- 배우자를 찾는 건 우리 안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것이지요. 잃어버린 나머지를 찾으면 우리의 세상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고요. p.101
- 신념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림으로써 더 큰 힘을 얻게 되지. 사람은 모두 힘을 갖고 있어. 하지만 모든 힘은 나름대로 약점이 있단다. p.103
- 아침은 저녁보다 지혜로운 법이다. (그러면 저녁은 아침보다 덜 지혜롭지만 더 따뜻하겠지. doolith.) p.105
- 요나 너는 그러면 뭘 가르칠 거냐? 배움은 귀담아 듣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을요. p.107
- 그럼 사랑도 사다리겠네요. 그래, 사랑이 없으면, 우린 자신에게서 벗어나 오를 수가 없지. p.112
- 하느님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들이 유머 감각을 잃는 경우가 너무 많지. p.115
- 우연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하느님의 방법이지요. 전 우리가 하느님의 반사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세상에서 우연만 볼지라도, 저는 우연을 '하느님의 겸손'이란 망토로 봅니다. p.116
- 우연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보게 되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기적을 만드는 것은 그것을 보려는 우리의 의지임을 되새기는 거지요. p.117
- 말을 덜 할수록 남들이 더 많이 들어주지요. p.117
- 야곱, 빵집에 있으면서 동시에 에덴 동산에서 일한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럼 어떤 일을 포기해야 하나요? p.119
- 하느님은 방향을 묻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어요. 나직이 말하고 크게 들어라. p.120
- 하느님께서 내게 친절을 베푸시네요. 친절에서 배우지 못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지요. p.124
- 하느님은 이삭이라는 제물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고뇌를 원하셨을 거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고뇌, 그리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우리가 이 교훈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시겠지.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을 넘어선 사랑임을 알게 될 테니까. p. 126
- 고독은 친밀감에 이르게 한다: 삶을 소음,움직임,다른 사람들로 꽉 채워 자신을 흩어지게 하지. 대부분 이런 것들이 저절로 습관이 되어 버려. 이런 습관을 지니면 자신과의 친밀감이 부족해지는 대가를 치르게 되는데도 우리는 군중 속에 외롭게 살면서, 자신을 찾는 것을 거부하지. 더 슬픈 것은 우리가 자신을 끌어안지 못하면 타인을 끌어안기도 힘들다는 점이지.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즐거움으을 원한다면, 홀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것이 모순처럼 들린다는 거 알아. 하지만 주변을 돌아봐. 삶은 끌어당기면 밀어내지. 하느님은 반대되는 것끼리 결혼시킨단다. 삶과 죽음, 밤과 낮, 남자와 여자, 그들의 모순 속에 둘의 일치가 있지. p.130
- 어떤 순간이든 자신의 현재 모습만 유지하려 할 때 다른 모습이 되지 못하는 대가 따르겠지요. 그게 자신의 경제학이지요. p.133
- 당신은 다르게 되었을지 모르는 모습에 투자하기를 주저하는 투자자. 다들 그렇듯, 당신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는 계약만 맺었다고 믿으니까요. p.134
- 뒤로 물러나 우리 삶을 살펴볼 시간,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이 쉬는 시간을 창조하신 거지요. 그것이 첫번째 법칙이지요, 안식일. 영적으로 신성한, 쉬는 시간이며 시계를 정지시키는 날이지요. 이 날은 우리에게 시간에 대해서까지 전체적으로 보게 해 줍니다. 일주일 중 하루는 뒤로 물러나서 우리가 짜나가는 태피스트리를 뒤집어봐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인생이 양면을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한 땀 한 땀 안에 커다란 문양이 담겨 있다는 것. 이상하게도 삶에서 물러서면 더 잘 보게 됩니다. 살면서 멈추는 습관이 들지 않아 힘든 것이지요. 그러다 멈추면 마치 삶의 모든 책임에서 벗어난 것 같고 또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도 못한 것 같지요. 그렇지만 멈춤 속에는 평온이 있고, 멈추는 사람만이 다시 시작하게 될 겁니다. p.138-139
- 한 순간의 평온이라도 그것 자체가 축복이지요. 또 우리에게 평온을 안겨주지 않는 축복은 축복이 아니고요. p.140
- 두려움은 용기의 아버지이고. 겸손의 할아버지며, 기도의 족장이란다. 두려움을 감당 못하는 사람은 용기를 찾지 못한다. 두려움은 우리가 전능하지 못하다는 깨달음이지. 우주에는 우리가 닿지 못하는 힘이 있다는 인식이고. 진짜 두려움은 겸손을 여는 문이야. 그리고 겸손은 기도를 여는 문이고. p.144
- 우리 대부분은 아는 게 부족하지 않아. 우리가 아는 것을 실천할 인품을 갖추고 있느냐가 문제지. 우리의 인품은 우리가 지은 건축물이지. p.144
- 자만심은 우리 모두에게, 그것이 다른 사람의 기를 눌러준다고 설득하지. p.145
- 시간은 과수원이지요. 매 순간 기회가 익어갑니다. 내 삶의 순간 중 일부는 폭삭 익은 것 같은데? 자네는 내가 씨앗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군. 씨앗 속에는 과수원이 있지요. p.147
- 삶은 반복되지. 다른 굽이를 돌며. 같은 강에서. p.148
- 하느님이 우리 팔을 왜 이렇게 길게 만들었는 줄 아세요? 이렇게 할 수 있으라고요. 막스는 야곱을 포옹하고 저쪽으로 걸어갔다. 야곱은 우정에 대해 생각했다. 소박함. 정직. 우정에 대해. p.150
- 어느 현자가 '나는 인생에서 고민이 많았는데, 대부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했지. 긴장을 풀게. 걱정은 그것을 원치 않는 사람까지도 찾아내는 법이니. p.151
- 많은 사람이 행복을 견뎌낼 용기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p.152
-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건이 아니라네. 무엇이 아니라 누구라네. 그리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지 않는 것일세. p.170
-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타인을 스승으로 보는 것보다 우리가 학생이 되겠다는 의지와 더 관계가 깊지요. p.158
-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주세요. "내가 모두를 변장시키겠다. 그럼 모두가 너지만, 모습은 각자 다를 거야. 몇몇은 아주 다를 거고. 너조차도 까맣게 잊을 거야. p.167
- 기도를 잊어버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 얼마나 오래 숨을 참을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숨결이 넘치니까. 우리가 숨을 내쉴 때마다 우린 하느님의 친구가 되는 거란다. p.170
- 이분은 제게 지혜를 사랑하라는 것과 사랑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어요. 말의 세상에서는 할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아무 말 안 해도 둘은 서로 모든 말을 알아들었다. 바람에 꽃이 흔들렸다.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p.173
- 노아가 마른 땅을 찾느라 방주서 비둘기를 골라 보낸 까닭이 전설로 내려온단다. 다른 새는 지치면 바위나 나뭇가지에 내려앉지. 하지만 비둘기는 지치더라도 날기를 멈추지 않는단다. 한쪽 날개를 쉬면 다른 날개로 날지. 길을 갈 때, 너 자신을 쉬게 할 수 있는 힘을 갖기를! 또 네가 없으니 내가 다시 한쪽 날개로 나는 법을 배우게 되기를! p.181
- 감사합니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요? 이제 아멘이라고 말하자꾸나. p.182
- 자라는 것은 늙지 않지요. 사랑도 그렇고요. p.184
3. 책으로 나를 들여다본다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여러 순간이 찾아올 때도 우리가 흔들림 없이 갈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주변 사람, 이웃들 덕분이다. 작지만 소중한 관계 안에서 날 기다려주고 지지해주는 이에 대한 어떤 불확실한 믿음 덕분에 오늘도 내 하루가 받아들여지고 또 이렇게 살아진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한다. 가족이고 친구인 그 이웃들이 아니라면, 보이지 않는 푯대 하나를 무식하게 한 발 앞에 꽂아가며 조금씩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이 일은 거의 대부분 무의미할 뿐이다. 삶의 마지막이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존재는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닫는 동시에 또한 주어진 이 삶에서 얼마나 사소한 것들부터가 축복인지도 깨닫게 된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상에, 의미 있는 관계를 하나 맺고 누군가에게 그 마음을 표현하며 행복을 일구어간다는 것, 그게 작은 의미의 사랑이며 프롬이 말하는 동사론적 사랑일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 속 주인공 빵장수 야곱은 그러한 삶의 지혜를 피조물의 입장으로 하나씩 읖조리듯 말한다. 창조자가 있다는 가정 하에 그가 말하는 삶의 축복은 그래서 사소한 곳에서 발견하는 것들이며, 그래서 가장 찾기 어려울 수도 있는 기쁨들이다.
아이들에게서 우리가 여전히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른들에게 없는 저 친구들만의 순수함, 굳어지지 않은 자유로움과 유연함 때문이다. 왜 신이 우리에게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알게 하고 또 작은 아이들로부터 큰 어른들이 배울 수 있다고 하셨는지를 종종 생각한다. 교사로서 내가 아이들에게 무작정 가르치려고 들고 쏘아붙이기만 하며 아무런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저들의 방식과 생각을 재단했을지를 생각해 본다. 어른들의 눈에 보이는 아이들의 무지함이 실은 무지가 아닌 새로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고 살아가는 시간이 많았다. 사유가 사라진 시간들이 너무 많았다. 내려 놓고 싶었던 것과 정말 내려 놓아야 하는 것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을 나의 시간들을 이해하자. 대신, 이 4월에 16일을 앞두고 잠시나마 우리에게 찾아 온 새 봄을 정말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다짐을 흉내라도 내 본다. (2018. 4. 14)
'책 > 책이 나를 읽어 BookLo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간의 거리를 둔다> 리뷰 (0) | 2019.03.27 |
---|---|
일기일회 - 법정 (0) | 2018.05.26 |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0) | 2012.01.10 |
관계중심시간경영 / 황병구 (0) | 2011.11.30 |
김대중 자서전 2 (0) | 2011.06.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