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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둘리/가르치는 게 뭘까?

실패하고 실망하고 희망하고

by Minking 2018. 5. 23.

실패하고, 실망하고, 희망하고

 

한 아이가 있다. 3월부터 시작해 거의 매일 다른 문제로 나와 만난다. 학습, 생활습관, 친구관계를 비롯해 그 안에서도 정말 다층적인 카테고리를 갖고 종종 문제를 일으킨다. 혹은 드러나게 일으키진 않지만 스스로 문제를 끌어안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가 보이는 불안감이다. 6학년임에도 불구하고 3월부터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에 대해 어머니에게 이야기했을 때, 어머니는 집에서는 그러지 않는데, 학교에서는 그러나요?’라고 되물으셨다. 단순한 궁금증으로만 묻는 게 아닌 것 같은 묘한 어감에 나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간단한 이유는, 학교가 집보다 훨씬 더 불편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격차가 다른 아이들에겐 보이지 않는데 유독 이 아이에게는 더 심하게 느껴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아이들이 느끼는 힘듦보다 이 아이가 느끼는 학교살이의 어려움을 사실 부모는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다. 학교생활은 결국 아이 본인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해결책을 찾고자 함께 노력할 방법이 없을지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하는 대화의 자리에서 오히려 그 공을 학교로 던져 놓는 느낌을 받은 순간, 나는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아이 개인의 문제, 혹은 학교와 담임의 문제로 이해하고 계시다는 인상을 직감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여 동안의 긴 통화를 마친 후, 그 아이에게서 보이는 문제행동의 뿌리는 훨씬 더 이전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 해 전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근원적으로 풀리지 않는 아이의 불안을 보면서 진지하게 상담해야 할 사람은 사실 아이가 아닌 부모라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해도 좋을지에 대한 확신이 잘 들지 않아 막상 말을 꺼낼 용기도 나지 않았다. 꺼냈다간 어떤 식의 화살이 돌아올지 나 역시 인간적으로 두렵고 감당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밖엔 아직 나아가지 못했다는 자책을 넘어서는 어떠한 방어기제가 나에게 작동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으로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아이의 학교살이를 돕기로 마음 먹고 실천하는 것까지다. 그리고 이것 역시 나에겐 큰 도전이기도 하다.


담임으로서 아이들에게 갖는 욕심이 너무 없어서 점점 사소해지고 느슨해지는 것 같아 미안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맡은 아이들이 배움의 본질을 조금씩이라도 맛보았으면, 그리고 친구들과도 더불어 어울려 살 줄 아는 아이들이었으면 하는 것들이 실은 욕심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이 목표는 매우 높고 이상적이다. 매일 벌어지는 교실 현장에서 어쩌다 한 번 잠깐 맛볼 수 있는 기쁨이고 뿌듯함이어서, 막상 지루한 잔소리와 긴 상담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게 되기 쉽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우리 학급의 가치와 큰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나와 충돌을 빚는 몇몇의 아이를 잠시 떠올려 본다.

그 아이는 사실 뭘 잘못하고 있는 아이라기보다 위의 경우처럼 근원적인 뿌리가 깊어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일 때가 많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까지 습관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은 아이, 라고 보는 것이 더 희망적이고 또한 객관적일 것이다.

학습방법을 터득하고 학교생활을 비교적 일관되게 해 나가는 자기관리의 습관이 갖춰지지 않은 것이고, 친구관계에서 바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예절의 습관을 잘 길러오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과 부대끼다 보면 그걸 잊고 마치 나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게 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만만한 교사인가'라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거나 그 연쇄 과정으로 아이를 과도하게 다그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하지만 반대로 아이에게 있는 문제를 오히려 객관화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리에 있기로 마음먹는 순간, 방법은 오히려 간단해진다. 결핍된 습관을 아이가 알아차리고 실천하겠다는 마음을 먹도록 돕게 되고, 결국 아이도 그 계획을 일관되게 실천해 나갈 때, 선순환의 작용으로 아이도 스스로의 성취에 만족을 느끼며 그 맛을 계속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담임과의 충돌은 줄어들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긍정적 자극과 격려가 오가게 된다.

 

그래서 결론은 이것이다. 사실 담임살이의 시작과 중간과 끝은 결과적으로 아이 개개인에게 집중하는 것이라는.

한두 아이를 단순히 말 잘 듣게 한다는 것도 아니고, 혹은 그런 아이들이 없는 교실이 행복하다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일 년을 살면서 단순한 수치만으로 결코 한두 명일 리가 없다. 하지만 때때로 다가 오는 그 아이, 혹은 일 년을 두고 도움이 필요한 그 한두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고 아웃포커스하는 과정, 동시에 다수의 아이들에게도 조리개를 다 열고 다초점으로 만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일이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나와 크게 충돌하지 않는다면은, 그리고 이러한 학급의 그림과 가치가 나 혼자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니라 모두 함께 해 보기로 마음먹은 약속의 일환이라면, 결국 담임인 내가 성장하는 지점은 내가 보기에 훌륭해 보이던 대다수의 아이들이 아닌, 그 불편한 아이에게 있다. 이는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고 교사 한 개인의 성장을 두고 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치 나의 헌신이 저 아이에게 도움이 되라고 한 일임을 스스로 뿌듯해 할 일도, 혹은 그만큼 따라오지 않는다거나 아웃풋이 인풋 만큼의 효율성을 띠지 못한다고 속상해할 일도 아닌 것이다. 한두 명의 불편한 아이가 나에게 숙제처럼 다가올 때 그 아이를 알아가고 함께 문제를 돕는 과정이 또한 나를 돕는 길임을 받아들여야 하겠다. 이것은 마음 가는대로 생각할 일이 아니라, 생각을 하고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어서 이렇게 한 번 더 다져 쓴다.

 

13년차가 된 나는 3년차였던 나보다 훨씬 능란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지조차도 의문이거니와, 아이들에 대한 기대치는 더 높아만 가고 믿음은 더 낮아져만 간다. 이 모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라도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덜 기대하고 더 믿는 자리에 있기로 다짐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내가 가는 방식이 옳다고 확신하며 아집에 사로잡혀 갈 것 같다. 두렵다, 그런 고집이 자리잡아가는 내 모습을 어쩌다 교실에서 마주할 때가.

완전할 수 없더라도 매일 조금씩은 서로가 온전해지도록, 그래서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이들과 만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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